고구려 제25대 평원왕(재위 559~590년) 때, 온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비록 가난하여 모습이 남루했으나, 속마음은 착하고 밝아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한편, 평강공주는 어릴 때 자주 울어 아버지(평원왕)로부터 “이렇게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라는 농담을 자주 듣고 자랐다.
그 후, 평강공주가 16세가 되던 때 아버지가 높은 지위(귀족)에 있는 고씨 집안에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평강공주는 이를 거역하고,
예전에 평원왕에게 들었던 농담을 들먹이며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왕은 기가 막혀 공주를 말렸지만, 오히려 공주는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왕에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
하며 되려 왕의 말을 되받았다. 공주가 고집을 꺾지 않자. 화가 난 평원왕은 공주를 궁 밖으로 내쫓았는데,
이때 공주는 금팔찌 등 패물을 몸에 지니고 나와 가난하고 무식한 온달을 찾아가 부부가 되었다.
그 후 평강공주는 궁에서 나올 때 가져온 패물을 팔아서 집과 논밭을 마련하고 가난에 시달린 온달의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며,
온달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일자무식했던 가난뱅이 온달을 고구려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이 되게 하였다.
집안의 형편이 어려운 중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떡장수를 해가면서 자식 공부에 힘쓴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한석봉(1543~1609)을 출가시켜 글씨 공부를 10년간 시킨다.
출가하여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석봉은 3년이 되었을 때. 스승님이나 주위 사람들이 한석봉이 글씨를 보고 놀라며 무척 잘 쓴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렇게 되자 한석봉은 이제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한석봉을 바라본 어머니는 아들에게 반갑다는 한마디 말씀도 안 하시고, 떡과 붓을 준비한 후, 어머니는 떡을 쓸고, 한석봉은 글을 쓰기로 하고,
방안의 초롱불을 끈다. 시간이 지난 뒤, 불을 켜보니 어머니의 떡은 보기 좋게 썰려 있으나 한석봉의 글은 엉망이었다.
이를 본 한석봉은 자신의 부족함을 크게 깨닫고, 어머니에 자신의 부족함에 용서를 빌고, 약속한 10년간의 공부를 마치려 곧바로 다시 집을 떠나 절로 갔다.
결국, 석봉은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힘입어 남은 7년을 채우고 10년간의 공부를 마친 뒤, 시험에 합격하여 사자관이 되었으며,
국가의 문서와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을 뿐 아니라 중국에 사절로 갈 때는 사서관으로 파견되기도 하는 등 조선의 가장 훌륭한 명필이 되었다.
호는 무애.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서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영문과 졸업하였으며, 1945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고,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1958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고,
1962년 다시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어 동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하고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훈장 무궁화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신라 향가 등 한국 고가(古歌)를 연구하여 초기 국어 학제에 큰 업적을 남겼다.
시 작품에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귀에 익은 「어머니의 마음」 등을 작시했다.